[1906년] 월드 시리즈 : 시카고 더비, ‘무안타의 전설’ 화이트삭스의 대이변
1906년 10월 9일부터 14일까지 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특별한 월드 시리즈가 펼쳐졌다. 당시 최고의 야구 도시로 불리던 시카고에서 양대 리그의 두 팀, 시카고 화이트삭스(Chicago White Sox)와 시카고 컵스(Chicago Cubs)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놓고 격돌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같은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이 맞붙은 월드 시리즈였으며,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컵스를 상대로 '무안타의 전설'로 불리던 화이트삭스가 대이변을 연출하며 우승을 차지해 야구 팬들을 놀라게 했다.
1. 역사상 첫 시카고 더비 월드 시리즈
1906년 월드 시리즈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무엇보다도 같은 도시의 두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은 최초의 사례였다.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시카고 컵스와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간의 대결은 시카고 시민들의 열광적인 관심 속에 펼쳐졌다. 당시 경기장은 컵스의 웨스트 사이드 그라운즈(West Side Grounds)와 화이트삭스의 사우스 사이드 파크(South Side Park)를 오가며 진행되었다.
두 팀 모두에게는 이번 월드 시리즈가 첫 출전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컵스는 이 시리즈를 시작으로 3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고, 화이트삭스는 이후 1917년에 다시 월드 시리즈 무대를 밟게 된다. 시카고 야구의 황금기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 시리즈에 참가한 선수 중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이 많았다. 화이트삭스에서는 조지 데이비스(George Davis)와 에드 월시(Ed Walsh), 컵스에서는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 프랭크 챈스(Frank Chance), 조니 에버스(Johnny Evers), 조 팅커(Joe Tinker) 등이 대표적이다.
2. 압도적인 강팀, 시카고 컵스 vs. '무안타의 전설', 화이트삭스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대다수의 전문가와 팬들은 시카고 컵스의 압도적인 우승을 점쳤다. 컵스는 당시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고 승률인 0.763을 기록하며 116승 36패의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들은 투수진과 타선 모두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으며, 내셔널리그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컵스 타선은 시즌 평균자책점 1.59로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무안타의 전설(Hitless Wonders)'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타선이 빈약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팀 타율이 겨우 0.230에 불과했다. 화이트삭스는 주로 번트와 도루, 작전 플레이를 통해 득점을 올리는 스몰볼(small ball) 야구를 구사했다. 그러나 화이트삭스에게는 컵스에 버금가는 강력한 투수진이 있었다. 에드 월시(Ed Walsh), 프랭키 스미스(Frank Owen), 독 화이트(Doc White)가 이끄는 선발진은 리그 정상급이었으며, 이들의 마운드가 화이트삭스를 월드 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시즌 막판까지 타선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93승 58패, 승률 0.616으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팀(컵스)과 최고의 수비력(특히 투수진)을 가진 팀(화이트삭스) 간의 대결은 '창과 방패의 싸움'으로 비유되며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창이 방패를 뚫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3. 시리즈의 흐름 : 원정팀의 이변과 눈보라 속의 혈투
예상과 달리 1906년 월드 시리즈는 시작부터 예측 불허의 전개로 흘러갔다. 첫 두 경기는 놀랍게도 눈보라 속에서 치러졌다. 10월 초 시카고에 때아닌 눈이 내리며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경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런 날씨에 월드 시리즈가 진행된 것은 1997년이 되어서야 다시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시리즈의 첫 다섯 경기가 모두 원정팀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 1905년 월드 시리즈에서 홈팀의 불패 신화가 깨진 데 이어, 1906년 시리즈에서는 원정팀의 연승이 이어지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90년 후인 1996년 월드 시리즈와 2019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1차전(10월 9일, 웨스트 사이드 그라운즈) : 화이트삭스 승 (2-1).
- 승리투수 : 닉 올트록(Nick Altrock, 시카고 화이트삭스, 1승)
- 패전투수 :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 시카고 컵스, 1패)
강호 컵스를 상대로 화이트삭스가 기선을 제압하며 이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차전(10월 10일, 사우스 사이드 파크) : 컵스 승 (7-1).
- 승리투수 : 에드 로일바크(Ed Reulbach, 시카고 컵스, 1승)
- 패전투수 : 독 화이트(Doc White, 시카고 화이트삭스, 1패)
컵스가 대승을 거두며 반격, 역시 컵스라는 평가를 받았다.
3차전(10월 11일, 웨스트 사이드 그라운즈) : 화이트삭스 승 (3-0).
- 승리투수 : 에드 월시(Ed Walsh, 시카고 화이트삭스, 1승)
- 패전투수 : 잭 피스터(Jack Pfiester, 시카고 컵스, 1패)
화이트삭스의 에이스 에드 월시(Ed Walsh)의 압도적인 투구가 빛났다. 월시는 이 경기에서 1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완봉승을 거두었고, 모든 이닝에서 최소 한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최초의 월드 시리즈 투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압도적인 투구는 1968년 밥 깁슨(Bob Gibson)에 의해 다시 한번 기록된다.
4차전(10월 12일, 사우스 사이드 파크) : 컵스 승 (1-0).
- 승리투수 :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 시카고 컵스, 1승 1패)
- 패전투수 : 닉 올트록(Nick Altrock, 시카고 컵스, 1승 1패)
팽팽한 투수전 끝에 컵스가 신승을 거두며 시리즈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5차전(10월 13일, 웨스트 사이드 그라운즈) : 화이트삭스 승 (8-6).
- 승리투수 : 에드 월시(Ed Walsh, 시카고 화이트삭스, 2승)
- 패전투수 : 잭 피스터(Jack Pfiester, 시카고 컵스, 2패)
- 세이브 : 독 화이트(Doc White, 시카고 화이트삭스)
화이트삭스가 타선이 폭발하며 중요한 5차전을 가져갔다. 이 경기에서 화이트삭스의 독 화이트(Doc White)는 최초의 월드 시리즈 세이브를 기록했다 (세이브는 1969년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기 전이었다).
6차전(10월 14일, 사우스 사이드 파크) : 화이트삭스 승 (8-3)
- 승리투수 : 독 화이트(Doc White, 시카고 화이트삭스, 1승 1패)
- 패전투수 :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 시카고 컵스, 1승 2패)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화이트삭스가 앞선 상황에서 대망의 6차전이 1906년 10월 14일 화이트삭스의 홈 구장인 사우스 사이드 파크에서 열렸다. 컵스의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이 다시 선발 등판했고, 화이트삭스는 독 화이트(Doc White)가 마운드에 올랐다.예상과 달리 컵스의 브라운은 단 하루 휴식 후 등판한 탓인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화이트삭스 타선은 2회말까지 브라운을 상대로 8안타 7득점을 뽑아내며 맹공을 퍼부었다. '무안타의 전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화이트삭스 타자들이 불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독 화이트는 안정적인 피칭으로 컵스 타선을 봉쇄했고, 9회초 컵스가 한 점을 만회하고 만루 찬스를 만들었지만, 화이트삭스는 프랭크 슐츠(Frank Schulte)를 땅볼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최종 스코어 8-3.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4승 2패로 1906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화이트삭스가 홈 구장에서 포스트시즌 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으며, 시카고 연고 팀이 홈 구장에서 시리즈를 우승한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다. (이는 컵스가 2015년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4. 시리즈가 남긴 기록과 이면의 이야기들
1906년 월드 시리즈는 승패를 떠나 많은 흥미로운 기록들을 남겼다.
- 명예의 전당 인필드 트리오의 침묵 : 컵스의 내야 트리오인 조 팅커(Joe Tinker, 유격수), 조니 에버스(Johnny Evers, 2루수), 프랭크 챈스(Frank Chance, 1루수)는 훗날 '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시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셋이 합쳐 59타수 9안타(타율 0.153)에 그치며 부진했다.
- 투수들의 명승부 : 에드 월시(Ed Walsh)와 모데카이 브라운(Mordecai Brown)이라는 두 명의 명예의 전당 투수가 이 시리즈에 등판했지만, 정작 서로 맞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 처음 보는 선수들 : 화이트삭스의 빌 오닐(Bill O'Neill)은 3차전에서 월드 시리즈 최초의 대주자(pinch runner)로 기록되었다 .
-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 : 화이트삭스의 팻시 도허티(Patsy Dougherty)는 1903년 보스턴 아메리칸스(Boston Americans)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에 출전해 우승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1906년 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며 월드 시리즈에 출전해 두 번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 기록적인 무안타 : 화이트삭스 포수 빌리 설리반(Billy Sullivan)과 컵스 외야수 지미 쉐카드(Jimmy Sheckard)는 나란히 시리즈 2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1968년까지 깨지지 않는 월드 시리즈 최다 타수 무안타 기록이었으며, 설리반의 22타석 무출루 기록은 현재까지도 월드 시리즈 기록으로 남아있다.
컵스는 이 시리즈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2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강팀의 면모를 이어갔다. 반면 화이트삭스는 1917년 다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만, '블랙삭스 스캔들'이라는 오명을 남기며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1906년 월드 시리즈는 최강의 팀이 반드시 우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야구의 묘미를 보여준 명승부였다. 약팀으로 평가받던 화이트삭스가 컵스라는 거함을 상대로 '무안타의 전설'이라는 오명을 씻고 짜릿한 승리를 거둔 이 경기는 여전히 야구 팬들에게 회자되며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예측 불가능한 결과와 인간 드라마가 깃든 역사적인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